더없이 특별하고 소중해진 ‘하루’

코로나19로 깨닫는 것들


우리가 이토록 애달프게 각자의 일상을 사랑한 적이 있었을까? 코로나19의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는 동안 이어진 ‘기다림’은 사람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열렬히 사모하게 만들어버렸다. 코로나19라는 병마가 사람들의 손발을 묶고 바이러스는 어떤 면에선 우리 일상을 중지시켰다. 


본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은 달력의 검은 글자처럼 평범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매일같이 찾아왔고 염원하지 않아도 늘 곁에 있는 가족 같았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랬던 ‘일상’이 돌변했다. 달력 속 빨간 날이라도 된 냥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무작위로 선정된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 ‘하루’가 영원한 이별을 고하고 떠나는 님처럼 굴었다. 아직 매일 찾아와 주는 이들에게는 ‘하루’는 마치 입장이 역전된 갑처럼 굴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평범하던 하루는 더없이 특별하고 소중해졌다. 평범해 보이던 이성이 ‘저리도 매력적이었나?’하며 눈 씻고 다시 보게 된 순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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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매력은 ‘자유’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 하루의 매력 중 하나는 ‘자유’다. 코로나가 오기 전만 해도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구속받고 있고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여겨왔다. 생활에 얽매여서, 일 속에 파묻혀 또는 관계에 구속받으며 오늘을 보냈다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해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게 느낀다. 우리의 일상 속에는 빵 반죽에 발린 버터처럼 부드럽고 고소한 자유가 많이 녹아 있었다고 말이다. 


우선 마스크를 하면서부터 마스크를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자체가 얼마나 크나큰 자유였는지를 깨닫게 됐다. 마스크를 사고 챙기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 노력이 전혀 들지 않던 시절이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물론 마스크를 하면서 여성들은 화장(makeup)하는 수고로부터 벗어나고 스타일을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건 생각지 못한 새로운 유형의 자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스크를 안 해도 되는 자유와 비교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일상을 파고들면서 새롭게 발견된 자유 중 하나는 가고 싶은 곳에 가고, 있고 싶은 곳에 있을 수 있는 이동의 자유다. 확진된 환자들은 치료를 위해 병실에 갇히고 자가 격리자들은 자신의 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길게는 2주간 버텨야만 했다. 확진자와 동선이라도 겹치면 비감염자라도 조심해야 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높아지거나 인근에 감염자가 발생하면 자발적인 집돌이와 집순이를 선택한다. 마음껏 도심 속을 활보하며 맛집을 탐방하고, 카페에 앉아 점원이 갓 내려다 준 드립커피를 마시며 벗들과 노닥거리던 소소한 드나듦의 자유가 말할 수 없이 특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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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우나 고우나 ‘우리’


코로나가 일깨워준 ‘평범한 하루’의 매력 속에는 자유만 아니라 ‘우리’가 있다. 어느새 ‘우리’보다 ‘나’가, ‘함께’보다는 ‘혼자’가 익숙하고 편해진 사람들에게 코로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이어주고 있다. 과연 그럴까? 대다수 사람들에겐 코로나바이러스가 오히려 우리의 ‘인간관계’라는 꽃밭을 망쳐버리고 있다는 느낌이 지배적일 것이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참다못한 사람들이 바이러스 진원지, 슈퍼 전파국 운운하며 특정 국가나 민족 · 지역에 대한 적개심의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마스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이웃이나 배려심 없는 모임을 목격하기라도 하면 맹비난을 쏟아붓는다. 심지어 직장과 학교에 가는 대신 하루 종일 집안에 함께 갇혀 지내는 가족들조차 서로 극심한 스트레스의 원흉이 되고 있는 마당에 ‘우리’라니? 


나타나는 모습이나 감정은 그렇지만 코로나19가 준 메시지는 조금 의외다. 바로 ‘모든 사람은 미우나 고우나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라는 진리이다. 나라 간에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도 지구촌은 이미 한 곳이 잘못되면 다른 곳도 잘못될 수밖에 없는 유기체다. 너무 당연해서 잊기 쉬운 진리이지만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이래로 나만 잘한다고 해서 잘 살 수 있는 시대는 갔다. 한 나라 안의 지역 공동체나 가족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병들면 나도 병들 수 있고 내가 병들면 상대도 병들 수 있다. ‘혼밥’ ‘혼술’을 즐기는 이들조차도 막상 외딴 섬에 혼자 떨어지면 잘 살기는 어렵다. 한 지붕 아래 함께 사는 가족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상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치 2인 3각 경기에서 함께 발을 묶은 팀원이 넘어져서 결국 자신까지 게임에서 지고 말았을 때 느끼는 상실감 같은 것이 꿈틀대곤 했다. 그러면서도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홀가분한 혼자로 존재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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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을 그리며


하지만 코로나19가 보여준 건 ‘우리’라는 공동체가 우리 모두의 생존에 얼마나 필수적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선 직업적 소명감을 가졌든 그렇지 않든 확진자들 곁에서 밤낮없이 일하는 의료진이 이를 입증했다.


자가 격리 중인 사람들의 집 문 앞에 격려의 메시지가 담긴 식료품을 몰래 두고 가거나 집 건너편 창가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착한 이웃들이 아직 멸종되지 않았음도 확인됐다. 혹은 길에서 마스크를 하지 못한 채 집을 나설 수밖에 없는 갓난아기를 보면 아기의 안전을 위해 한참을 돌아가는 어른들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치료제와 백신 개발을 위해 막대한 재산을 아낌없이 출자하는 기업가 마인드와 인류애를 목격했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가족 구성원들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부대끼며 체온을 나누고 있다. 


서두에 적어본 시의 화자는 결의에 찬 어조로 다음과 같이 각오를 다진다.

코로나19라는 혹독한 현실을 지나고 있는 지금은 아직도 어두운 밤, 더구나 눈이 퍼붓는 밤일지도 모른다. 확진자 수 0명이 지속되는 어느 날,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되는 어느 날엔가는 마스크를 벗고 코로나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되면 또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애달픈 사랑 또한 멎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누군가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했는지, 얼마나 그리워했었는지를 기억해낼 것이다. 행복은 결국 이처럼 사철이 지나는 동안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듯이,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는 사람들의 소유가 될 것이다.